< 구 경 서 정치학박사/전 강남대 겸임교수>

어느새 가을이다. 지겹도록 무더웠던 여름도 시간에 밀려 지나가고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가을이 왔다. 하루가 멀다하고 쉽게 변심하는 사람의 마음과 달리 세상과 자연의 이치는 한 치의 틀림도 없다. 작년 이 맘 때의 그 가을이 정확하게 다시 찾아 왔다. 더위에 지친 몸도 가을 바람을 바람을 타고 엔돌핀이 수직 상승하고 있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했지만 누구에게나 가을은 가슴을 촉촉이 적셔 준다. 불쾌지수의 노예가 되었던 여름의 짜증은 부드럽게 살갗을 터치하는 가을 바람에 말라간다. 푸르디 푸른 높은 하늘에 가슴은 청량해지고 발걸음은 어느새 덕풍천을 걷는다.

 
 

오후의 나른한 햇빛도 덕풍천의 가을엔 청량하다. 금강아지풀이 어른 키 만큼이나 크게 자라 가을 햇빛을 흠뻑 머금으며 금빛으로 나의 눈으로 반사한다. 만지면 솜 같은 금강아지풀의 부드러움이 손 끝에 닿을 듯하다. 금강아지풀 사이로 억새가 가을바람에 출렁이며 가슴에 남아 있는 찌꺼기들을 쓸어낸다. 가슴이 시원하다.
 

덕풍천을 찬찬히 걷다보면 갖가지 꽃들이 지천이다. 코스모스, 쑥부쟁이, 달개비꽃, 구절초, 들국화, 울릉국화 등 가을의 꽃들이 제각기 가을을 만끽하고 있다. 나를 바라보는 꽃들을 보며 걸으면 나또한 가을에 푹 빠져들고 어느새 발걸음은 가을의 중심에 와 있다.

덕풍천에 흐르는 물속엔 피라미 송사리들이 한가로이 유영을 한다. 한 두 마리가 아니다. 수 백마리가 무리를 지어 맑은 물속에서 가을 햇빛을 즐기는 민물고기를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가을 햇빛을 투명하게 받아들이는 작은 비늘이 은빛으로 반짝인다. 눈이 부시다. 요즘 덕풍천은 여유, 한가로움, 쉼, 휴식, 청량함 그리고 마음의 풍요로움이 가득하다.

이런 가을엔 시라도 읊조리고 싶다.

 

가을엔
                              /추경희

시간이 가랑잎에 묻어와

조석으로 여물어 갈 때

앞 내 물소리

조약돌에 섞여

가을 소리로 흘러 내리면

들릴 듯 말 듯

낯익은 벌레소리

가슴에서 머문다

하루가 달 속에서 등을 켜면

한 페이지 그림을 접 듯

요란 했던 한 해가

정원 가득 하늘이 좁다

 

시멘트가 만들어준 사각의 각박한 삶 속에서 코 끝을 가볍게 스쳐가는 가을의 향기를 맡고 싶으면 덕풍천을 찬찬히 걸어 보면 어떨까?. 그동안 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우리의 삶이 보인다. 미워했던 사람도, 가슴에 남아 있는 서운함도,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스트레스도, 보기 싫은 세상도 다시 새롭게 보인다,

 이 가을, 덕풍천을 찬찬히 걸어 보세요.